우리는 과연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2025-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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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류학자 이노세 고헤이의 저서 「야생의 실종(野生の失踪)」은 지적 장애와 자폐가 있는 친형과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허물고 타자와 관계 맺는 근본적인 방식과 그 방식에 투영된 ‘정형화된 관점’을 묻는다. 

우리는 상대를 안다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는가. 온전히 이해되지 않는 미지와 무지를 우린 견딜 의지가 있는가. 이해와 몰이해, 언뜻 양자택일처럼 보이는 이 순간을 우린 어떻게 새로운 가능성으로 우린 끌어안을 수 있을지, 이노세 고헤이는 ‘야생의 실종’을 이야기한다.

느티책방에서 직접 만나 듣게 된 그의 집필 과정과 그 안에 숨은 이야기들을 통해 느낀 건, 그의 겸손함이었다. “형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는 함부로 정의하지 않는다. 쉬이 분류하려 하지 않는다. 이해와 몰이해 사이의 불편함까지도 포용하려는 그의 의지가 시종일관 느껴졌다. 상대를 향한 ‘사랑’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그 겸손함을 나는 체득하고 싶어졌다.


일시: 2025년 7월 28일 7시30분 ~ 9시

장소: 느티책방

늙음과 장애, 사회가 우리를 타자화하는 방식에 대해서


코로나로 모두가 격리되어 있던 어느 날 새벽, 저자의 형은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집을 뛰쳐나갔다. 지적장애와 자폐가 있는 형이 실종되었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어떻게든 형을 다시 찾게 되는 과정을 몇 번 거듭하며 저자 이노세 고헤이는 고민하기 시작한다. 형의 실종이 과연 실종에 지나지 않는걸까 라며.

“형을 다시 발견한 건, 다름아닌 아버지 집이었습니다.” 저자의 집에서부터 무려 55km 떨어진 아버지의 집까지 형은 달려간 셈인데, 이노세 고헤이는 이를 "아버지를 만나러 가고자 하는 강한 의지의 표명"으로 해석했다. 모두가 당연하게 ‘단절’을 받아들였던 당시, 형은 그것을 온몸으로 거부하며 자신만의 ‘의지‘를 드러내고 관철시켰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자기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삶을 살고 있느냐... (형은) 소위 장애인이라고 불리지만, 이만큼 의지를 표명한 거죠."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넘어 우리는 타인과의 소통에서도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단할 뿐인 그 ‘이해의 과정‘에 지나친 확증을 부여하고 다른 가능성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용납하지 않는다. ’지적 장애가 있으니까.’는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 ‘당신은 그런 취향의 사람이니까.’, ‘당신은 그런 부류이니까’와 결코 다르지 않다. 결코 메울 수 없는 미지의 공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든 틈을 메워 편리하게 구분 지으려 한다. 그 단단한 세계에 새로운 이해를 위한 앎의 자리와 진정한 소통을 위해 머물러야 할 쉼의 터전은 없다. 저자는 그 점을 묻는다. ‘사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서로 잘 모르는 존재들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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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라는 강박의 틀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

저자는 형의 행동이나 말을 섣불리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형의 진짜 모습에서 멀어지는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 사회는 장애를 가진 이들을 ‘이해’ 가능한 틀 안에 가두고 분류하려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시도가 얼마나 피상적이고 단편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불쾌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가 시작될 가능성”이라고 말하며, 섣부른 판단과 해석을 유보할 것을 제안한다.

이 책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보편적인 울림으로 확장된다. 저자 이노세 고헤이 역시 “세상을 바꿀 힘이 없다고 여겨지는, 평범하고 사소한 존재 안에, 미약하지만 강인한 힘이 숨어있다”고 말한다.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거대한 사회적 사건 속에서, 마스크도 쓰지 않고 ‘질주’하는 형의 모습은 사회가 규정한 ‘정상성’과 통제 시스템에 균열을 내는 상징적인 행위로 그려진다. 이 반발을 우린 ‘위험’과 ‘일탈’로 정의하지만, 이는 거대 담론에 휩쓸리지 않는 개인의 고유한 존재 방식과 그 의미를 곱씹게한다.

우리 사회는 거대한 획일성과 집단주의 속에서 성장을 일궈왔다. 그것이 효율을 담보하고 위험을 소거하는 데에 탁월한 기능을 발휘해온 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린 그 안에 존재했을 다양한 존재론적 생태계를 가꾸고 키워내는 일은 미뤄왔다. 언제서부턴지 모르게 ’나다움‘이라는 키워드가 부상하게 된 건 그 생태계를 향한 열망의 발로이자, 지금 우리 사회에서 분류되지 않는 개인들의 수가 많다는 증거임과 동시에, 그것에 가장 취약한 사회라는 반증이 아닐까. 


‘타인과 어떻게 관계 맺고 살 것인가’를 묻는다

그런점에서 이 책은 단순한 질주와 실종 사이의 관계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함께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형과의 관계를 통해 끊임없이 어긋나고 마찰하면서도, 또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해가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비단 장애인과의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가족, 타인, 나아가 사회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던 소통의 방식, 즉 언어를 넘어서는 감각과 몸짓, 침묵의 의미를 재발견하게 한다. 효율성과 합리성, 그리고 명확한 ‘이해’를 중시하는 우리 사회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야생적 감각’과 타자와의 진정한 공존의 의미를 되찾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진하다. 번역을 맡았던 박동섭 연구가도 덧붙여 말한다. 

“남녀 관계에서 가장 멋진 말이 뭔지 아십니까? 잘 모르지만 좀 더 알고 싶다. 반대로 나는 당신을 다 알았다는 건, 관계를 끝낸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타자를 알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함께 있을 수 있는' 영역은 확고해 지는 반면 이해의 폭은 한정된다. 그러나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다소 불편할 지언정 우리는 타자와 '함께 있을 수 있을' 영역을 늘릴 수 있다고 그는 ‘옮긴이의 말’에서 역설한다. 이는 우리가 섣불리 재단하는 사회적 소수자들을 대할 때 필요한 자세와도 상통한다.

“모르는 타자, 그들을 앞에 두고 어떤 유형'(장애인, 여성, 일본인, 성소수자 등)을 들이 대고 해석하면서 닿지 못하는 거리를 메워나간다. 그런데 그것은 내 안에서 대부분은 거의 즉시 이루어진다. 그러한 시간이 너무 길면 우리는 불편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시간을 내 안의 순간의 시간에서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 있는 더 긴 시간으로 연장해서, 혹은 심지어 그것이 타자와 있는 시간 대부분을 다 차지하고 끝나버려도 그/그녀와 보낼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서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함께 있을 수 있다'

'타자와 있는 것'이 내 안에서 그러한 시간을 거친 후에야 찾아오는 '서로 알게 된'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이 시간은 참고 견뎌야 할 고통의 시간이겠지만, 서로 알 수 없는 시간'='타자와 있는 것'이라고 고쳐 생각하면, 이것은 그렇게 고 통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거기에는 언제나 나의 '이해'를 넘어선, 예상치도 못한 '타자'가 있다.”

책의 말미에 위치해 있는 ‘옮긴이의 말‘은 이 책에서 꼭 읽어봐야 백미(白米)같은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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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북토크 후에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다. 내가 타인을 대하는 방식에 얼마만큼 확언의 마음이 있었던가. 이해하지 못할 상대를 섣불리 판단하고 분류하려 하지 않았나. 이해를 가장하며 불안감을 지워내려 꽤나 서두르진 않았을까. ’알게 되는 시간’ 자체를 느긋하게 상대를 관조하며 미지의 영역을 탐구하려 했던가. 

도무지 이해 못할 타인에게서 느껴지는 ’불안감’은 달리 말하면 상대의 ’타자성’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아니, 그 불안감은 그렇게 해소 되어야만 한다. 당신을 나와 다른 하나의 존재로 기꺼이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마음,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건 어쩌면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누군가를 안다고 섣불리 말하지 않는 건, 사랑의 가능성을 열어 젖히고 싶은 열망이 있는 사람들만의 습관일 수 있겠다. 앞으로 나는 상대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유보한다. 이해하기 위한 안간힘보다 함께 존재하는 시간을 골몰하겠다. 물론,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일지 “사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 겸손함까지가 사랑의 범위라고 나는 정의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