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년여의 시일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났다. 무엇이 부족했고 무엇이 좋았는지에 대한 세세한 회고보다 원한 바를 투영한 공간을 만들어 사람들을 끌어 당기는 힘을 축적하고 있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인 현실에 나는 만족한다.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그럼에도 쥐어짰을 때 나오는 몇 방울의 용기가 나는 반가웠고 떨리는 두 다리 부여잡고 어떻게든 직립하려 애쓰는 내 모습이 볼썽사납다가도 그게 참 나다워서 실소가 터져나온 순간들 적지 않았다.
공간을 운영한다는 일은, 그리고 회사 밖 개인으로 사는 일은 도무지 예측하기 힘든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과도 같다. 공간의 낡은 곳곳을 보수해야 하거나 원치 않을 때일지라도 사람들을 만나야 하거나, 잘 흘러가는 듯한 일이 삽시간에 어그러지거나, 무탈해 보였던 계획에서 가느다란 실금을 발견하는 일들은 울타리 안에 있었더라면 굳이 알 필요 없을 사사로운 일들에 가깝다.
그러나 이 시간들 안에서 한 가지 분명한 건, 다방면에서의 불편한 일들이 곧 나를 조금 더 알게 되는 과정이라는 점. 울타리 안에 있었더라면 마주할 일 없을 또 다른 나의 모습을 길어올릴 수 있다는 경험은 대부분 기껍지 않은 마음을 동반하지만 괴로움 속 일순 찾아오는 희열의 순간이 있음에 나는 다시금 삶에 겸허해진다. 조금 더 빨랐다면 더 좋았을 이 경험과 순간들을 내가 아는 이들 모두가 체감하길 진심으로 바라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이 체험적 진실을 알게 된 1년여 간이었다. 고심 끝에 누른 퇴사라는 버튼은 새로운 세계의 입구로 들어가는 버튼이었음에도 나는 그 세계의 초입에서 연신 과거의 버튼들을 굳이, 애써 찾았었다. 독립과 자주를 방해하고 미혹하는 유혹에 애써 세공한 주체성은 쉬이 반파되었다. 지나고 나니 내 미숙함과 어리석음이 여실히 보였고, 그 대가로 시간을 지불해야 했던 게 너무나도 뼈아팠다.
앞으로 펼쳐질 현실은 결코 예측할 수 없고, 이미 지나간 시간은 결코 되돌릴 길은 없다. 물을 엎지를 것을 예측할 수 없고 그렇게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있을리 만무하듯, 우리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짐작할 수 없고, 이미 벌어진 일을 바꿀 수도 없다. 자의로 선택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무언가를 의도와 상관없이 받아들여야 할 때가 더러 찾아오고 그럴 때마다 삶이 고난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기쁜 일도 시간 지나면 잠잠해지듯, 시련 또한 시간 지나고나면 잠잠해진다. 펄떡이며 요동치던 어떤 것이든 시간 앞에 겸허해진다.
잦은 등락을 반복하는 시간 속 우상향을 그려나가는 아주 미세한 각도는, 그렇게 쌓인 세계는 남들 눈에 쉬이 띄지 않는다. 앞으로 맺힐 열매의 과육은 어떤 시간을, 얼마나 충실히 보냈느냐에 달렸다. 누군가에게 증명하려 애쓰거나, 그 과정과 결과가 합리적일 필요도 없는 이 세계의 충실함은 아는 이에게 보이고, 볼 줄 아는 이에게 열릴 것이다. 바라고 갈망했던 근사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더라도, 앞으로를 기대할 수 있는 힘이 내 안에 자생하고 있음을 적어도 나는 안다. ‘시일’이 다소 걸리더라도, 구름떼처럼 사람들이 모이지 않더라도, 조급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함께 찾는 사람들, 속도에 매몰되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이 곳에 모인다면, 나는 그것을 성공이라 정의하련다.
Copyright 2024. 시일 북스앤웍스. All rights reserved.
1년여의 시일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났다. 무엇이 부족했고 무엇이 좋았는지에 대한 세세한 회고보다 원한 바를 투영한 공간을 만들어 사람들을 끌어 당기는 힘을 축적하고 있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인 현실에 나는 만족한다.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그럼에도 쥐어짰을 때 나오는 몇 방울의 용기가 나는 반가웠고 떨리는 두 다리 부여잡고 어떻게든 직립하려 애쓰는 내 모습이 볼썽사납다가도 그게 참 나다워서 실소가 터져나온 순간들 적지 않았다.
공간을 운영한다는 일은, 그리고 회사 밖 개인으로 사는 일은 도무지 예측하기 힘든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과도 같다. 공간의 낡은 곳곳을 보수해야 하거나 원치 않을 때일지라도 사람들을 만나야 하거나, 잘 흘러가는 듯한 일이 삽시간에 어그러지거나, 무탈해 보였던 계획에서 가느다란 실금을 발견하는 일들은 울타리 안에 있었더라면 굳이 알 필요 없을 사사로운 일들에 가깝다.
그러나 이 시간들 안에서 한 가지 분명한 건, 다방면에서의 불편한 일들이 곧 나를 조금 더 알게 되는 과정이라는 점. 울타리 안에 있었더라면 마주할 일 없을 또 다른 나의 모습을 길어올릴 수 있다는 경험은 대부분 기껍지 않은 마음을 동반하지만 괴로움 속 일순 찾아오는 희열의 순간이 있음에 나는 다시금 삶에 겸허해진다. 조금 더 빨랐다면 더 좋았을 이 경험과 순간들을 내가 아는 이들 모두가 체감하길 진심으로 바라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이 체험적 진실을 알게 된 1년여 간이었다. 고심 끝에 누른 퇴사라는 버튼은 새로운 세계의 입구로 들어가는 버튼이었음에도 나는 그 세계의 초입에서 연신 과거의 버튼들을 굳이, 애써 찾았었다. 독립과 자주를 방해하고 미혹하는 유혹에 애써 세공한 주체성은 쉬이 반파되었다. 지나고 나니 내 미숙함과 어리석음이 여실히 보였고, 그 대가로 시간을 지불해야 했던 게 너무나도 뼈아팠다.
앞으로 펼쳐질 현실은 결코 예측할 수 없고, 이미 지나간 시간은 결코 되돌릴 길은 없다. 물을 엎지를 것을 예측할 수 없고 그렇게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있을리 만무하듯, 우리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짐작할 수 없고, 이미 벌어진 일을 바꿀 수도 없다. 자의로 선택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무언가를 의도와 상관없이 받아들여야 할 때가 더러 찾아오고 그럴 때마다 삶이 고난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기쁜 일도 시간 지나면 잠잠해지듯, 시련 또한 시간 지나고나면 잠잠해진다. 펄떡이며 요동치던 어떤 것이든 시간 앞에 겸허해진다.
잦은 등락을 반복하는 시간 속 우상향을 그려나가는 아주 미세한 각도는, 그렇게 쌓인 세계는 남들 눈에 쉬이 띄지 않는다. 앞으로 맺힐 열매의 과육은 어떤 시간을, 얼마나 충실히 보냈느냐에 달렸다. 누군가에게 증명하려 애쓰거나, 그 과정과 결과가 합리적일 필요도 없는 이 세계의 충실함은 아는 이에게 보이고, 볼 줄 아는 이에게 열릴 것이다. 바라고 갈망했던 근사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더라도, 앞으로를 기대할 수 있는 힘이 내 안에 자생하고 있음을 적어도 나는 안다. ‘시일’이 다소 걸리더라도, 구름떼처럼 사람들이 모이지 않더라도, 조급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함께 찾는 사람들, 속도에 매몰되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이 곳에 모인다면, 나는 그것을 성공이라 정의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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