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얻어지는 건 쉽게 휘발된다

2024-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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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역경에도 불구하고 긴 호흡과 집중력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은 지나치게 짧은 현대의 유행에 강한 면역력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_ 토마스 기르스트, 『세상의 모든 시간』


1. 긴 글, 하물며 긴 영상도 사람들은 기피한다. 커다란 화면에 드라마나 영화를 틀어놓고 한 손에 쥔 핸드폰 속 스쳐 지나가는 짧은 영상들에 시선을 빼앗기는 모습, 텍스트 빼곡한 구간은 스크롤을 내리며 중간중간 큰 글씨만을 빠르게 훑어 읽는 사람에게서 나와 당신의 모습이 겹쳐보인다. 진득하게 무언가 하나를 끝까지 읽거나 보는 이들의 존재는 발견하기 어려울 뿐더러, 속도로 점철된 세상에 발을 맞추지 않고 엇박을 사는 듯한 사람들은 좀처럼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2. 생각해보면, 영화관에서 2시간 남짓 집중력 있게 무언가를 시청해야 하는 환경은 꽤 강한 집중력을 수반한다. OTT의 득세로 영화관은 점차 위기의 늪으로 향하고 있고 그것이 우리의 생활과 당장 큰 상관은 없어보이지만, 실은 영화관에서 우리가 연습하던 ‘집중력 있게 시청하던 습관’ 또한 함께 사라진다는 걸 의미한다. 비단 영화관만이 아니다. 우리 일상에서 집중력을 요하던 환경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3. 더 나아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서 긴 분량이나, 지루한 아주 조금의 요소도 피해야 할 해악으로 취급된다. 콘텐츠 생산자는 사람들의 관심을 붙잡기 위해, 콘텐츠 소비자는 지루한 현실 속 도파민을 탐닉하며 온라인 세계를 유영하기를 즐긴다. SNS에서조차도 피드(Feed)에 머무르고 읽기보다 스토리(Story)로 쉴새 없이 옮겨다니며 관심의 대상을 넓혀나간다. 제대로 보지 않고, 전부를 읽지 않는다. 봤다는 사실, 읽고 있는 모습만으로 충분히 소비되는 덕분이다. 

4. 물론,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의지만 있다면. 그 의지만 있다면 우린 얼마든지 긴 글을, 혹은 2시간 넘는 영상 콘텐츠에 집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의지가 모든 걸 해결해 주는 만능 열쇠는 분명 아니라는 걸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의지를 받침할 수 있는‘집중력’은 삽시간에 쌓아올릴 수 없는 역량이라 그것을 쌓기 위한 평소 습관이 필요하다. 열망은 있되, 지루한 그 과정을 감내하지 못하는 우리 모두는 시시각각 변하는 화면과 강한 자극에 체념한다. 그렇게 길들여진다.

5. 그러나 일상 속 단순한 관심과 소비의 관점을 넘어, 우리가 삶이라는 긴 텀(Term)의 시간을 운영할 때 필요한 건 깊은 사유와 하루하루의 일상을 하나의 서사로 엮을 수 있는 힘이다. 그 힘은 인내를 가지고 꾸준히 무언가에 집중해 온 시간과 이제 더는 없을 마지막까지 스스로를 밀어붙인 각고의 노력 위에 자생한다. 쉽게 얻어지는 건 쉽게 휘발된다는 말이 어느 누군가에겐 좌절이, 다른 어느 누군가에겐 믿음의 증거가 된다.



역주(譯註)

: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혹은 해야 할 말이 있는가.

서점가에 쏟아져나오는 책들은 결코 적지 않다. 서점가까지 갈 필요도 없이 온라인에 쏟아져나오는 무수히 많은 글들만 생각해봐도, 우린 엄청난 텍스트에 둘러쌓인 삶을 산다. 꼭 해야할 말인가, 곱씹는 시간이 늘었다. 나 또한 소음을 더하는 데 일조하는 것이 아닌가 하며, 꼭 하고 싶은 말이었는가를 돌아본다. 쓴 글들은 적지 않으나, 업로드 버튼 앞에서 망설이기 일쑤였다.⠀

마지막 글을 게재한 이후 3주간의 시간이 흘렀다. 지나온 시간 속에서 ‘그럼에도 남기고 싶은 이야기’과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뉘었다. 순간순간 서슬퍼런 검열의 날보다, 나는 이 자연스러움을 신뢰하기로 했다. 필연적으로 시간이 드는 일, 나는 그 시간을 끌어 안기로 작정한다.

시간이 드는 일이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일들은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시간이 든다. 혹은, 시간이 지나고나면 자명해지는 일들이 있다. 즉시성과 빠른 속도가 더 큰 능력으로 인정받는 요즘의 흐름은 효율과 성과라는 단기적 목표에는 부합할지 모르나 그 안에 담아야 하는 의미와 가치를 놓칠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한다. 식물을 기르는 일, 무언갈 끈덕지게 붙잡고 씨름해 보는 경험, 한계에 부딪히며 느끼는 좌절했던 시간은 당장엔 무의미해보일 지 모르나 결국 그 시간들이 내 세계의 가장 깊은 주춧돌이 되어왔음을, 나는 안다.

습관은 그래서 무섭고, 그래서 거대한 힘을 갖는다. 시간이 쌓여 창출되는 복리의 마법은 자본에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가 평소 소비하는 ‘시간’에도 발휘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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