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를 향한 우치다 다쓰루의 제언

2025-06-08

철학자 우치다 다쓰루는 오늘날 한국 사회가 직면한 다양한 갈증과 공백을 통찰한다. 아이브매거진과 책방무사가 함께 기획하고 준비한 이번 서울에서의 강연은 단순히 그의 철학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한국 사회에 뿌리 내린 삶의 태도와 존재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확인해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마르크스 독해와 무도 철학, 그리고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를 통해 내면화 해야 하는 구도자의 태도와 그것에서 비롯되는 자유함을 그는 시종일관 강조했다.

강연에서 그는 우리에게 지식의 습득을 넘어선 삶의 태도, 즉 끊임없이 배우고 성찰하며 자신을 비워내는 '수업'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이는 경쟁과 성과에 매몰된 현대 한국 사회에 필요한 깊은 성찰과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의미와 가치로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참가자들을 향해 일방향으로 이야기했지만, 마치 그와 쉴새 없는 담론의 시간을 가진 듯 했던 건 그의 저서 속 다양한 메시지들이 죽은 지식이 아닌 살아 숨쉬는 현재성을 지니기 때문이 아닐까. 박동섭 이라는 철학가이자 작가, 그리고 누구보다 다쓰루의 철학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이의 언어로 동시 통역된 덕분이기도 했으리라. 이런 시간은 전에 없었을 것이고, 다시 없을 것이다.

스승과 제자가 나누는 즐거운 대화의 향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고 한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지식인의 통찰을 강연에서 여실히 느낄 수 있었음은 물론, 노년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여전히 새로운 배움을 갈망하는 우치다 다쓰루의 젊음에 나는 압도당했다. 그것은 분명 청춘의 눈이었다. 

그의 눈빛과 표정이 나는 꽤 오래 기억될 것 같다. 그 잔상이, 현장에 미처 오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그의 메시지를 소개하는 글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 현상을 읽기 위해서 우린 보이는 것 너머 존재하는 ‘깊이’로 유영할 수밖에 없다는 그의 혜안으로 초대한다. 


기획: 아이브매거진, 책방무사 서울, 유유출판사

일시: 2025년 5월28일 5시 ~ 7시

장소: LG아트센터 서울 U+ STAGE

MOVEMENT라는 타이틀로 마련된 이번 전체 프로그램은 당초 7시에 종료된다고 공지되었지만 실제 현장에서 그의 이야기는 7시를 넘어 더 길게 이어졌다. 억지로 시간에 끼워맞추지 않으면서 그는 하고 싶었던 말을 모두 토해낸 듯 (적어도 내겐) 보였다. '신호와 소음'이라는 키워드로 우치다를 한국에 초대한 송주환 아이브 코퍼레이션 대표의 '제안'과 '설득'으로 본격적인 담론이 시작되었다. 동시통역을 맡으신 박동섭 님과 마치 대화를 나누는 듯 독백과 대화 사이를 넘나들며 그는 자신의 견해를 담담하지만 힘 있는 어조로 이야기했다. 


한국 사회가 놓친 철학적 기반, 마르크스 독해를 통해 시대를 이해하는 필수적인 눈

우치다 다쓰루는 '마르크스를 읽지 않고서는 19세기 이후의 역사를 설명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강연을 시작했다. 마르크스 사상이 19세기와 20세기,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대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양식이라는 것이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과 같은 세계사적 격동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마르크스의 통찰이 핵심적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이는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넘어, 우리가 현재 어떤 역사적 문맥 속에 놓여 있는지, 우리 자신의 위치와 정체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도 마르크스 독해가 필수적이라는 맥락을 그는 이야기했다.

그는 한국 사회에 마르크스 독해의 ‘공백’을 통렬히 지적했다. 이 공백은 현재의 현상을 해석할 수 있는 철학의 부재, 더 나아가 사상의 뼈대를 신체로 전유하지 못하고, 감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우치다의 말에 따르면, 마르크스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자(Marxist)가 아닌 '마르크시안(Marxian)'이 되어야 한다. 전자는 마르크스를 학문적으로 인용하지만, 후자는 마르크스를 삶으로 살아내기 때문이다.

우치다 자신이 마르크스를 ‘신체를 통과시킨 언어’로 전하고자 하는 사람이기에, 그가 한국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석했다. 난해한 텍스트 대신, 일상의 감각에 기대어 마르크스를 해석하는 그의 방식은 마치 헤르메스처럼 신과 인간 사이의 전달자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읽고 싶은 마르크스는, 개념의 숲을 헤매는 난해한 철학자가 아니라, 삶과 땀으로 번역된 사상가인 셈이라는 이야기다. 그가 한국 독자들에게 오랫동안 회자되는 이유 역시, 그가 마르크시안으로서 지적인 이해를 넘어선 살아있는 통찰을 제공하기 때문이라는 그의 말에 나는 공감했다. 우치다 다쓰루야말로 철학을 철학으로 사유하는 이가 아니라, 자신만의 ‘생활론’으로 변환하여 삶과 글에 담아내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수업(修業)’이라는 사유의 뿌리, 무도적 철학이 요청되는 사회

우치다는 한국 사회의 또 다른 결핍으로 ‘무도 철학’을 언급했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 사회가 이 결핍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갈망하고 있다는 그의 통찰이었다. 그는 이 결핍이 ‘수업(修業)’이라는 개념으로 집약된다고 보았다.

그가 말하는 수업(修業)이란, 목적도 종착지도 알지 못한 채 스승의 등을 보며 묵묵히 걷는 여정을 의미한다. 합기도든 철학이든, 수행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서로 다르지 않다고 그는 역설했다. 시작의 동기는 흐릿하고 끝은 보이지 않으며 성취가 비교의 대상이 아닌 이런 정진은, 성과 중심의 사회, 승패에 민감한 시스템, 속도와 효율이 미덕인 한국 사회에선 너무도 낯선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낙관론을 이야기했다. 한국 사회가 우치다를 통해 읽고 싶은 것은, 어쩌면 잊고 있었던 ‘무도적 사고’와 ‘자기 형성’의 오래된 감각을 되찾고자 하는 무의식적 몸짓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는 무도의 최종 목표인 '천하무적'이야말로, '대오각성' 또는 '해탈'을 통해 '무한 소실점'으로 나아가는 수업의 본질을 설명했다. 초심자는 자신이 왜 이 길을 걷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10년 이상 꾸준히 정진해야 비로소 한 걸음을 뗄 수 있다는 것. 수업의 역설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어떤 동기로 시작했더라도 그 시작의 이유가 사라지고, 새로운 목표와 동기가 끊임없이 생성되며 스스로 성장하는 과정이 수업의 본질이라는 그의 말은, 이는 성과와 효율성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에서 '과정' 그 자체의 가치와 지속적인 노력이 가지는 힘을 의미한다.


레비나스 철학과의 만남에서 조명하는 바람직한 수업의 태도와 자세

이번 강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를 처음 읽었을 때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제자가 되고 싶었다”는 고백이었다. 더불어 에마뉘엘 레비나스 철학과의 만남을 통해 직면했던 '수업'의 자세를 더 깊게 이야기했다. 그는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미성숙했기 때문에 레비나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는, 지식의 깊이를 판단하는 척도가 ‘인간적인 성숙’이라는 그의 철학적 입장을 여실히 드러내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여기서 그는 ‘연구자’와 ‘제자’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연구자는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프레임에 사상을 넣고 다루는 사람이라면, 제자는 자신의 지식과 정보가 쓸데없음을 인정하고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사람, 곧 자신의 프레임을 무너뜨리고 타인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사람이다. 알지 못하는 것을 발견해서 기쁜 사람, 그것을 기꺼이 배우고자 하는 사람. 그것이 제자이며, 그 길은 항상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삶의 자세를 동반한다.

이것은 단지 철학을 대하는 태도일 뿐 아니라, 모든 관계와 학습,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깊은 성찰과도 직결된다. 우리 사회는 ‘몰라서 불안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지만, 우치다는 그 반대의 존재로서 '몰라서 기쁜 사람'을 제시한다. 이는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려는 진정한 학문의 자세를 보여주며, 자신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다는 '무지(無知)의 자각'이 배움의 시작임을 강조했다.


무지(無知)의 자각과 우리가 지향해야 할 철학적 태도

그런 점에서 우치다 다쓰루는 도서관의 역할을 단순히 지식을 과시하는 공간이 아닌, 자신의 무지를 끊임없이 자각하는 장소로 정의한다고 역설했다. 책을 진열해 놓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정보를 획득했는가를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세상을 모르고 무지한 존재인지, 얼마나 그릇이 작은 인간인지를 '가시화시켜주는' 역할이라는 것이다. 무지를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 그것이 진정한 독서의 자세이며 철학의 태도라고 그는 강조했다.

그는 경쟁 사회의 왕도가 '적들을 물리치고 위에 서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진정한 자기 형성의 왕도는 '경쟁에 반대하는 수업(수행)'이라고 단언했다. 무도는 강약을 따지지 않고, 승패를 따지지 않으며, 상대적 우열을 논하지 않는다. 이기면 이기는 것에 주저앉고 멈추게 되어 성장을 저해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승리의 내재된 속성을 언급했다. 때문에 진정한 무도는 ‘자유자재’를 얻는 과정이며, 상대적 우열감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깊이 탐구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는 승패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닦는 과정의 중요성을 의미한다.

경쟁은 타자를 이기려는 방식으로 나를 만들지만, 수업은 타자와 함께 걷는 방식으로 나를 만든다. 그리고 그 걷기는 이기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 성숙을 위한 행위와도 같다. 승패를 따지지 않고 우열을 가리지 않으며 단지 걷는 것,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한국 사회가 잃어버린 무도인의 철학이자, 우치다가 제시하는 대안적 사유 방식이라는 점에서 그의 강연의 의미를 가늠해볼 수 잇었다.


결국, 한국 사회가 우치다 다쓰루를 통해 읽고자 하는 것

“왜 한국 사람들이 나의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걸까요?”

우치다 다쓰루는 한국 사회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유를 '무도적 사고', 즉 승패에 얽매이지 않고 상대적 우열을 가리지 않는 삶에 대한 동경에서 찾는다. 그는 자신이 새로운 것을 한국에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한국에 있었어야 할 이야기'를 일깨워주는 역할이라고 결론 지었다. 한국 사회가 본래 지니고 있었던 것을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는 사람, 그것이 자신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는 마르크스 사상을 자신의 언어로 체화하고, 무도적 사고와 같은 깊은 면을 파고드는 젊은 연구자들, 즉 새로운 마르크시안들이 한국에도 곧 등장할 것이라고 믿으며, 이러한 새로운 정신과 흐름이 한국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가 ‘외래 문물’로서 자신의 철학이 아닌 ‘이미 존재하는 잠재된 철학’을 이야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의 아카이브 속, 잠들어 있던 사유의 감각을 다시 흔들어 깨우는 일. 그것이야말로 우치다가 지금 한국에 필요한 이유이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수업의 철학’이 아닐까.

우리 대부분이 지각하는 우리 사회의 공백을 메우고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나는 그의 철학이 요긴하다는 데 공감한다. 독해되지 않는 시대, 길을 잃은 독자, 일방향적으로 성공을 쫓는 사람들에게 우치다는 ‘걷는 철학’을 제시한다. 성과지향이 아닌, 그리고 합리와 효율만을 숭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정작 중요한 건 그저 끝모를 배움을 향해 정진하는 자세여야 한다는 그의 철학은, 철학과 무도의 만남이자, 철학과 삶을 잇는 가교와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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